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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PHN : Research in Community and Public Health Nur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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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Res Community Public Health Nurs > Volume 36(3); 2025 > Article
Original Article
일신부인병원 조산사 양성교육과 그 의미: 1953년-1978년
김은영1orcid, 이지현2orcid
The Midwifery Training Program at Ilshin Women’s Hospital and Its Meaning: From 1953 to 1978
Eunyoung Kim1orcid, Jihyun Lee2orcid
Research in Community and Public Health Nursing 2025;36(3):292-303.
DOI: https://doi.org/10.12799/rcphn.2025.01109
Published online: September 30, 2025

1동아대학교 간호대학 교수

2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1Professor, College of Nursing, Dong-A University, Busan, Korea

2Research Fellow, Institute of Korean Studies, Pusan National University, Busan, Korea

Corresponding author: Jihyun Le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Pusan National University, 2, Busandaehak-ro 63beon-gil, Geumjeong-gu, Busan, 46241, Korea. Tel: +82-10-3213-7505, E-mail: ochajlee@hanmail.net
• Received: May 3, 2025   • Revised: August 9, 2025   • Accepted: August 12, 2025

© 2025 Korean Academy of Community Health Nursing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Derivs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d/4.0) which allows readers to disseminate and reuse the article, as well as share and reuse the scientific material. It does not permit the creation of derivative works without specific p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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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urpos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eaning of the midwifery training program initiated by Australian missionaries at Ilshin Women’s Hospital in 1953.
  • Methods
    Historical methodology using the annual reports (1953-1970) published by Ilshin Women's Hospital and related newspapers, magazines, and books as the primary source.
  • Results
    The Ilshin Women’s Hospital was established in 1952 by Australian missionaries Helen P. Mackenzie and Catherine M. Mackenzie. In response to the exigencies of the Korean War, the hospital initiated a program to train midwives in 1953. The objective of midwifery training program was to improve the health of women and children by providing nurses with sufficient education and training to be responsible for prenatal care and normal delivery service. As of December 1978, a total of 1,037 nurses had received midwifery training over a period of 26 years. These midwives have advanced into urban and rural areas across the country to take charge of maternal and child health care, contributing to reducing the gap in maternal and child health practice.
  • Conclusion
    The midwifery training program at Ilshin Women's Hospital has had an impact on enhancing maternal and child health at the community and national levels by graduating professional healthcare personnel through hands-on training that can be put into practice. It has also improved the level of maternal and child health in Korea through its systematic midwifery education and management system.
연구의 필요성
조산사는 출산을 전문적으로 돕는 직업으로, 시대에 따라 산파, 조산원, 조산사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역할과 기능도 달라져왔다. 조선시대의 산파는 출산을 돕는 역할을 하였으나, 집안이나 이웃의 연륜 있는 일반 여성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의료인이 아니었다[1]. 우리나라에서 조산사를 의료인의 하나로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학이 도입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동안이었다[2].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에서 산파 양성을 담당하도록 하면서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었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산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3].
일신부인병원(1982년 일신기독병원으로 개명)은 호주인으로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제임스 맥켄지(James N. Mackenzie, 1865-1956)의 두 딸인 헬렌 맥켄지(Helen P. Mackenzie, 1913-2009, 한국이름 매혜란, 이후 본 글에서 매혜란으로 표기)와 캐서린 맥켄지(Catherine M. Mackenzie, 1915-2005, 한국이름 매혜영, 이후 본 글에서 매혜영으로 표기)에 의해서, 1952년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설립되었다[4].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수많은 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하였고, 식량부족과 위생시설 미비 등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 가운데 있었다[5]. 호주에서 산부인과 의사였던 언니 매혜란과, 간호사이면서 조산교육을 받은 매혜영은 이러한 한국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모자보건과 전문의료인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가장 적합한 인력이 조산사라고 판단하였다[4,6]. 당시 대부분 가정분만을 하였고 병원 분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7], 전쟁 중 가장 취약한 대상인 여성과 아기를 돌볼 수 있는 인력으로 조산사를 양성하기로 하였다[4]. 일신부인병원은 1953년 간호사 7명을 대상으로 조산사 양성교육을 시작하여 2021년까지 68년 동안 2,647명의 조산사를 배출하였으며[4,8-10], 교육을 받은 이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병원에서 산부인과 업무를 담당하거나 도시 및 농어촌 지역에서 조산원을 개업하여 산전관리, 분만개조, 산후관리, 영유아 건강관리 등을 담당하였다[4,9]. 일신부인병원은 조산교육기관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던 1950년대에 조산교육을 시작하여, 1960년대 정부의 인정을 받은 조산수습기관으로서, 병원 외부 지원자 교육까지 담당하는 등[11], 우리나라 조산교육의 토대를 만들고 모자보건 수준을 높이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12].
일신부인병원이 우리나라 모자보건 수준의 향상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검토할 부분을 많이 남겨 둔 채이다. 관련된 세 편의 논문 중 Kim[12]은 구술자료 및 일신부인병원 40년사를 토대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조산교육을 살펴보았으며, Lee[13,14]는 일신부인병원이 한국민사원조사령부(Korean Civil Assistance Command, KCAC)와 경제조정관실(Office of the Economic Coordinator, OEC)에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보고한 연간보고서를 토대로 조산교육을 검토하였다. 이 연구들은 구술자료나 연간보고서 등 일부 자료만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 당시의 상황과 교수자 및 교육생, 졸업생들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을 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즉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검토하거나[12]과 여성 전문 인력으로서 조산사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1950~1960년대 조산사 양성 교육과 그 중심에 있었던 일신부인병원을 조명하고 있는데[13,14], 본 연구에서는 선행 연구들을 수용하되, 간호학적 관점에서 자료를 해석하고 파악하여 조산사 교육과정과 교육목적, 교육내용의 실태를 실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대상 시기는 조산교육을 시작한 매혜영이 교육 담당자로 활동했던 1953년부터 1978년까지[8], 일신부인병원 조산 교육의 첫 26년 동안의 내용을 포괄하여 살펴보았다.
연구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일신부인병원 연간보고서, 조산교육을 담당했던 교수자가 작성한 논문과 기고문, 졸업생 및 주변 사람들의 수기 등 다양한 자료를 종합하여 전체적이고도 입체적으로 일신부인병원의 조산사 양성교육과 관련된 상황과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일신부인병원의 조산사 양성교육이 시작된 배경과 목적, 교수자, 교육과정 및 교육내용, 교육대상, 졸업생의 활동내용 등을 폭넓게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와 영향에 대한 전체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일신부인병원의 조산사 양성교육의 실제와 그 의미를 고찰하기 위한 역사적 연구로서, 일차 사료로 일신부인병원에서 발간한 연간보고서 및 관련된 보고서,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을 검토하였다. 일신부인병원의 연간보고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1953년부터 1960년까지는 KCAC와 OEC에 보고한 것이고[4], 1968년과 1970년에는 호주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Oxfam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9]. 또한 1952년 한국전쟁 당시 발간된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한국의 보건계획』 [5] 및 1957년 미군정 간호고문관이 작성한 『한국의 조산사 교육현황』[7]을 활용하였다.
이외에 조산교육을 초기에 담당했던 매혜영과 에이트 갈트(Eaith Galt, 1953-1961년 재직, 한국이름 고미옥, 이후 본 글에서 고미옥으로 표기)가 학술지와 잡지에 직접 작성하여 기고한 논문과 기사 등을 사용하였다. 단행본으로는 매혜영이 1978년 출판한 『간호조산학』 교과서[15], 일신부인병원 설립자인 매혜영과 매혜영에 관한 회고담인 『맥켄지가의 딸들』[6]과 『호주매씨가족의 한국소풍이야기』[16]를 활용하였다. 『맥켄지가의 딸들』은 일신부인병원 60년을 맞이하여 매혜영과 매혜란이 직접 작성한 회고담과 인터뷰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신부인병원에서 교육받은 조산사들, 함께 일했던 의사와 간호사, 도서관, 주방, 빨래방, 목수 등으로 일했던 여러 직원들, 동료 선교사, 가족과 지인 등 30여명이 이들을 추억하고 회고한 글들이 실려 있다[6]. 『호주매씨가족의 한국소풍이야기』는 매혜영과 매혜란이 은퇴 후 생활했던 호주 본가에서 발견된 사진, 편지, 영상 자료들을 모아 둔 도록이다[16]. 본 연구에서는 이상의 공식적인 기록물 및 다양한 사람들이 작성한 회고담과 수기 등을 통하여 그 당시 상황과 사실을 재구성하였다. 주요 이차 사료(secondary source)로는 『일신기독병원 40년사』[8], 『조산역사 100년: 1907-2006』[3],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17] 등이 사용되었다.
위의 일차, 이차 사료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구 결과를 구성하였다. 먼저 부산에서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하고 조산교육을 시작하게 된 배경과 목적에 대해 살펴본 후, 조산교육이 실제 어떠한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즉, 조산 교육에 참여한 교수자들의 구성과, 일신부인병원이 조산사 수습기관으로 정부 인정을 받게 된 1963년 이전과 이후의 조산사 교육 과정 및 교육 내용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실제로 일신부인병원 조산사 교육과정에서 훈련을 받은 실습생의 출신과 인원, 또 졸업생들의 활동 및 활동 지역에 대해서도 검토하여, 일신부인병원이 한국의 조산교육 수준의 질적 향상과 체계적인 모자보건 시스템을 전국으로 전파하는데 어떻게 기여하게 되었는지 검토하였다.
조산교육의 시작
1952년 9월, 일신부인병원은 호주선교사인 매혜란과 매혜영 자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일신(日新)’이란 말은 ‘날마다 새롭게’라는 뜻으로, 호주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부산경남 지역 선교 활동 당시 유치원이나 학교 등에 사용한 이름(일신유치원, 일신여학교, 동래일신여학교 등)이다[17]. 호주선교회는 1889년부터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 전인 1941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교육, 의료, 구제 사업을 펼쳤다[6]. 이들 중 한 명이 제임스 맥켄지로서, 일신부인병원 설립자인 두 자매의 아버지이다[17]. 두 자매는 부산에서 27년 동안 한센병자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며 이들을 돌본 아버지 제임스 맥켄지와 어머니 메리 켈리(Mary J. Kelly, 1880-1964) 사이에서 각각 1913년과 1915년에 태어나서, 1931년 호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에서 성장하였다[16].
호주에서 언니 매혜란은 멜버른대 의과대학(1933-1938년)을 졸업하고 퀸 빅토리아 병원에서 수련을 받아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고, 동생 매혜영은 로얄 멜버른 간호학교(1933-1937년)를 졸업하고 조산사 면허를 취득(1939년)하였다[6]. 매혜영은 1940년에는 영아보육과정(Infant welfare course)을 6개월간 이수하고 1944년까지 퀸 빅토리아병원과 로얄빅토리아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간호교수과 과정을 수료하여 간호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17]. 매혜란과 매혜영은 호주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여러 번 좌절되었다. 이들은 1945년부터 1949년 공산당이 점령하여 1950년 6월 선교활동이 중단될 때까지 중국에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고향인 부산에 도착하였다[6,17].
1952년 한국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였다. 전쟁으로 전국이 폐허가 되어, 주택과 식수가 부족하고 오물처리 등이 잘 안되어서 전염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이 전체 사망의 23%를 차지하였다[5]. 1952년 유엔(United Nations, UN)에서 추정한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한국이 150.2명으로, 미국 31.2명에 비해 약 5배가 높아서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18]. 임산부는 산전간호나 출산을 위해 병원을 찾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약 95%의 분만이 가정에서 이루어졌다[7].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은 전쟁 이전 인구가 47만 명 정도였으나, 피난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하여 약 100만이 되었다[19]. 피난민의 생활은 매우 열악하였고, 특히 전쟁으로 부모나 남편을 잃은 아이들과 여성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5].
매혜란과 매혜영 자매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의료서비스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이 배운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일신부인병원의 명칭에 ‘부인’을 사용한 이유는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병원’을 만들려고 했던 병원 설립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6]. 이들의 첫 번째 목적은 전쟁 중 가장 취약한 여성과 아이들을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차별 없이 치료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여성에게 간호사나 조산사로서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17]. 이들은 소수의 직원을 제외하고 의사, 간호사 등 대부분 직원을 여성으로 고용하였고, 부족한 조산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조산사는 한국전쟁 중 의료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황에서 임신이나 출산으로 사망하는 모성사망률과 영아사망률을 낮출 수 있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5]. 해방 이후 미군정에서도 부족한 의료인 중 조산사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배출할 수 있고, 여성과 아동 복지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산사 양성이 필요하다고 하였다[7].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과 외국 원조기관의 지원이 매혜란과 매혜영 자매가 조산사 양성과정을 시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14]. 일신부인병원은 설립한 다음 해인 1953년 5월부터 조산사 양성교육과정을 열고 학생을 받기 시작하였다[4].
조산교육의 실제

조산교육의 목적

일제강점기 조산교육은 병원부속의 산파양성소에서 담당하였으나, 기관마다 입학수준과 수업기간을 다르게 운영하였다. 해방이후 정부에서는 산파양성소를 폐지하고, 입학수준과 교육기간을 통일하였다[20]. 즉 간호학교에서 조산교육도 포함하도록 하였으며, 입학자격을 중학교 졸업자로, 교육기간도 3년으로 통일하였다. 조산사 면허를 위해서는 간호학교 3학년 시기에 조산실습을 20건 이상 하도록 하여, 졸업 후 조산사와 간호사 면허를 동시에 취득하게 하였다[3]. 해방이후 조산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은 위와 같이 조산실습을 포함한 간호학교를 졸업하거나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20]. 자격시험이란 현재의 검정고시로 간호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조산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조산사는 1949년 1,358명, 1955년 2,171명, 1960년 4,134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자격시험을 통해서 한국전쟁 후 부족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함이었다[13].
해방이후 조산교육은 미군정의 주도하에 미국식으로 간호교육과 조산교육을 단일화하여 간호-조산사 제도(nurse-midwifery)를 만들려는 것이었다[5]. 그러나 조산사 면허를 받기 위한 조건인 간호학생이 20건의 분만과정에 참여하는 실습을 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웠다. 대부분 가정에서 분만이 이루어졌고 병원 분만율이 매우 낮아서, 병원이 분만실을 거의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 또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조산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산사 중 조산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7].
일신부인병원에서 1953년부터 조산사 교육을 담당했던 미국선교사 고미옥은 이 당시 한국 상황과 조산사 교육의 문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21].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조산사가 훈련받았으나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부주의한 습관이 몸에 배었다. 한국이 해방된 이후 미국식 간호를 모델로 삼아 조산사 교육을 생략하고 산과 간호만 3개월간 실시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의사가 산전관리와 분만을 책임지는 국가에는 적합하지만 한국처럼 의사가 충분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간호사나 조산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간호사는 교육과정에서 분만에 대한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한다. 현재 한국은 잘 훈련된 조산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매혜란과 매혜영 자매는 일신부인병원 설립 직후 조산교육의 문제를 인식하고, 조산사 양성교육을 시작하였다.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간호사에게 충분한 조산교육과 훈련을 제공하여, 이들이 적절한 산전관리와 교육 및 정상적인 분만을 담당함으로써 여성과 아동의 건강수준을 높이는 것이다[21].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의 또 다른 목적은 미래의 교수자를 교육하는 것으로[4], 이들은 전국의 간호학교와 병원에서 온 간호사들을 조산사로 잘 훈련시켜서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어 전달교육을 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8]. 전달교육이란 교육을 받은 조산사가 자신이 원래 근무했던 병원이나 간호학교로 돌아가서, 일신부인병원에서 받은 교육내용을 다른 간호사나 조산사에게 다시 전달하게 하는 것이다. 일신부인병원은 체계적인 조산교육 내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하여 조산교육과정의 입학생을 다양한 지역과 병원에서 받기 위하여 노력하였다[4,9].
마지막으로 일신부인병원은 교육받은 조산사가 대도시뿐 아니라 농어촌 지역까지 진출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자보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4,6]. 1950년대 한국인들은 주로 농어촌에 거주하였고, 인구의 약 15%만이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5]. 대부분 농어촌은 의료의 혜택이 부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매혜영은 조산교육생이 수료할 때마다 농어촌 지역으로 보내려고 노력하였고 해마다 졸업생들을 직접 방문하여 교육하고 격려하였다[6].

교수자

일신부인병원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사람은 교육 초창기에는 설립자인 매혜영과 간호선교사인 고미옥이었으며, 이후 이들에게 교육받은 한국인 조산사들과 함께 교육하였다. 일부 의학 부문의 강의는 원장인 매혜란과 산부인과 의사인 이홍주(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52-1965년 재직) 등이 담당하였으며[6], 이후 파견된 간호선교사들이 함께 하였다[4].

1. 매혜영

병원 설립 직후부터 매혜영은 일신부인병원 전체 간호의 책임자로 조산교육도 담당하였다[4]. 매혜영은 호주에서 간호사 면허와 조산사 면허, 간호교수 자격을 획득하여 이를 담당하기에 충분하였고,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 한국 간호사 면허(1954년)와 조산사 면허(1955년)도 취득하였다[16]. 또한 5년간 중국에서 병원 수간호사로서 간호사와 간호학생들을 교육시켰던 경험 등 다양한 실무경험이 모두 한국에서 교육자로서 활약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되었다[6].
매혜영은 일신부인병원에서 직접 조산사 양성교육을 맡아서 지도하였으며, 이론과 실습 모두 중시하는 엄격한 교육자였다[6]. 그는 여성이 건강해야 아기를 건강하게 출산하고 키울 수 있으며,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모자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6]. 매혜영은 1953년부터 1978년 은퇴할 때까지 26년 동안 조산사 교육을 담당하였고, 은퇴 직전 한국어로 『간호조산학』 교재를 발간하였다[15]. 한국조산사의 어머니로 불렸던 매혜영은 1975년 그 동안의 업적을 인정받아서 외국인 최초로 한국에서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여받았으며[22]. 이외에도 한국 정부로부터 1976년 국민훈장 목련장과 1992년 보건사회부 장관 감사패를[16], 영국 정부로부터는 영국제국 메달을 수여받았다[17].
또한 매혜영은 언니 매혜란과 함께 일신부인병원이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무료 진료를 할 수 있도록 은퇴 전 호주의 각 주를 돌아다니면서 기금을 마련하는 등[6] 한국의 여성과 아이들이 의료 혜택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까지 수고하고 헌신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한국에 있는 동안 선교사의 신분으로, 병원에서 월급을 받지 않았던 이들은 은퇴 후 호주로 돌아갔고[6], 매혜영은 2005년 90세까지 자원봉사를 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다 멜버른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묘비에는 ‘한국 조산사 교육의 선구자’라고 적혀 있다[16]. Figure 1은 매혜영이 1950년대 일신부인병원 직원들과 무의촌 진료를 가는 사진과 조산교육생 1기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16].

2. 고미옥과 간호선교사들

고미옥은 1953년 1월 미국 연합교회 선교회 소속으로 일신부인병원에 파송되었다[4]. 고미옥은 매혜영 자매가 중국에서 의료선교를 할 때도 같이 일했던 동료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모두 고미옥의 합류를 기뻐하였다[[6]. 고미옥은 간호사이면서 조산경험이 있어서 매혜영과 함께 조산교육과 간호사들의 관리를 맡았으며[8], 특히 1957년 매혜영의 휴가기간 동안 조산교육을 전담하기도 했으나[4], 1961년 고미옥은 급성 회백척수염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6]. 1965년 건축한 직원 기숙사를 ‘고미옥 기념 기숙사’로 명명하여 일신에서의 그녀의 헌신을 기념하였다[17]. 또한 고미옥은 “한국의 조산사”라는 글을 미국간호저널(American Journal of Nursing)에 투고하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데 기여하였다[21].
고미옥 이외에도 한국에 와서 조산사 교육에 도움을 주었던 선교간호사가 있었다[8,17]. 릴리안 매트유(Lillian Mattews, 한국이름 마희연, 1963-1967년 재직)는 간호사로 수술실에 근무하며 조산사 교육에도 함께 하였고, 도로시 나이트(Dorothy Knight, 한국이름 나명애, 1968-1972년 재직)는 릴리안 매트유의 후임으로 간호부에서 일했다[8,17]. 캐서린 딕(Katherine Dyck, 1955-1956년 재직)은 영아부의 책임간호사로 일하던 중 한국에서 사고로 사망하였다[8,17]. 멧제 메슬리(Madge Mesley, 1963-1964년 재직)와 케이 피디안(Kay Fiddian, 1964-1965년 재직)은 각각 1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지만 영아부 간호사로 일하였다[8,17]. 선교사들은 대부분 한국이름을 가지고 한국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였다.

3. 한국인 간호조산사들

조산사 양성 교육을 하는 것은 병원을 설립한 주된 목적 중 하나였으며 매혜영은 이것을 본인의 사명이라고 여겼으나, 이를 혼자서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1952년 병원 초기 한국인 간호사 4명, 유경순, 김금련, 현정훈, 김금순이 근무하였는데, 이들을 먼저 교육시켜서 이후 조산사 양성교육에 참여하게 하였다[4]. 유경순은 1952년 36살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3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는데, 호주선교회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여 일신부인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6]. 유경순은 매혜영의 한국어 선생님이자 일신부인병원의 최초 한국인 간호사였고, 초기 동문회장을 맡아서 활동하였다[6]. 김금련은 대구동산기독병원 부속 간호학교를 졸업하고(1949년), 대구 동산기독병원에 근무하던 중 매혜영을 만나서[6], 1952년부터 1989년까지 37년을 일신부인병원에 재직하였다[8]. 김금련은 1962년에는 조산교육의 책임을 맡아서 일하였으며[4], 1958년부터 1989년까지 일신부인병원에서 간호부원장으로 근무하였고[8], 1989년에는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여받았다[23]
현정훈은 1952-1963년까지 조산사 교육과 간호행정을 담당하였다[8]. 현정훈과 김금련은 재직 중 호주 퀸 빅토리아 병원에서 유학의 기회를 가졌는데, 2년간 전문가 과정을 마치고 1958년 일신부인병원으로 복귀하였다[4]. 호주 퀸 빅토리아 병원은 매혜영이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근무하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매혜영은 이들이 호주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동료간호사와 공유하고, 조산사 양성교육의 개선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 조산분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보고하였다[4].
최정자는 세브란스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10월 일신부인병원에서 조산 교육을 마친 후 1957년 조산사 양성교육과정의 교수자로 일하였다[4]. 1957년 1월 미군정 간호고문관이 한국의 조산 훈련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최정자를 면담하였는데, 간호고문관이 최정자에게 뉴질랜드로 유학을 제안하였으나 매혜영의 안식년 기간 동안 일신부인병원에서 일하기로 했기 때문에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 미군정 간호고문관은 한국의 조산사가 전문적인 교수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전문적인 훈련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적합한 조산사 5명의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이 중 최정자를 포함한 3명이 일신부인병원에서 조산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7]. 이후 최정자는 조산사 양성 교육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서 일신부인병원의 지원으로 1958년 호주로 유학을 갔다[4]. 일신부인병원에서는 한국인 조산사를 교육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산 분야의 전문가이자 교수자로 성장시켜서 조산교육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교육과정 및 교육내용

1. 1953년-1962년 초창기 교육

해방 이후 조산사 면허는 간호학교 졸업자 또는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에[20], 대부분의 조산사가 조산교육과 조산경험이 없었다. 1953년 일신부인병원은 한국의 조산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하여 졸업한 간호사를 대상으로 조산사 정규과정을 개설하였는데, 이는 정부의 허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4]. 교육기간 6개월 동안 분만 전 관리, 정상분만, 분만 후 관리, 정상 및 미숙아 관리 등 이론 강의와 실습 경험을 제공하였다[21]. 이 교육과정은 이론과 실습의 연계를 강조하였으며, 특히 실무 경험을 중요하게 여겨서 학생 당 최소 20건의 분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4].
1958년 11월부터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교육기간을 6개월에서 9개월로 연장하였다[4]. 매혜영이 1962년 Korea calling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변화된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다[16].
“수강생은 산전 관리에 관한 지시사항을 포함하여 최소 150시간의 수업시간과 임상 훈련을 받으며, 임상 실습은 조산사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일반적인 예방관리 방법에 관하여 배우게 되고, 어떠한 상황에서 환자를 의사에게 보내야 하는지 또한 배우게 된다. 그들은 7주간 분만실에서 출산 중인 환자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이상 상태의 징후에 관해 배우게 된다. 그들은 정상적인 출산과 비정상적인 출산 두 가지 모두를 보며, 지도하에 최소 20명의 아기를 받아보게 된다.
분만실에서 교육생은 아기와 산모를 돌보는 방법과, 모자동실 시스템(rooming-in system)을 활용하여 산모에게 아기를 돌보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영아부(nursery)에서는 조산아(premature)나 아픈 신생아를 돌보는 법을 배우고, 영양실조와 잘못된 관리에 의한 결과를 보며 인공영양(artificial feeding)을 통해 치료하는 법을 배운다. 교육생은 교육과정이 끝날 무렵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훈련을 통해 실무에 나가 경험을 계속 쌓아 나가기에는 충분한 상태에 다다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조산교육은 정상분만시 출산관리에 집중되어 있었다[2]. 그러나 일신부인병원 조산교육에서는 산전관리와 산후관리를 매우 강조하여 산모와 아기의 건강문제를 예방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4]. 1957년 산전관리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부산의 독일적십자병원 1주 1회를 제외하고 없었는데, 일신부인병원은 매일 운영하였고 매일 평균 86회의 산전관리를 하였다[7]. 조산교육생은 산전관리에 대한 이론강의 및 산전관리실 실습을 통하여 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한국은 대부분 모유수유를 했기 때문에, 산모가 사망하거나 모유가 부족한 경우 영양실조의 문제가 심각하였다[5]. 일신부인병원에서는 외국의 원조로 우유를 무료로 공급하는 영아부를 별도로 운영하였는데, 이곳에서 영유아 영양관리 뿐만 아니라 건강관리 및 예방접종, 산모의 건강상담 및 육아상담을 하였다[4]. 조산교육생은 영아부 실습을 통해서 영유아 건강관리 및 산후관리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조산교육생을 가정분만 시 동행하여, 농어촌 지역에서 조산원을 개업하여 단독으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7].

2. 1963년 이후 교육

1962년 국민의료법이 의료법으로 전면 개정되었다. 개정된 의료법상 조산사는 “간호원의 면허를 가진 자로서 보건사회부장관이 인정하는 의료기관에서 1년간 조산의 수습과정을 필한 자”로 규정하였다[24]. 즉 이전까지는 지정된 학교를 졸업하거나 자격시험만으로도 조산사가 될 수 있었던 조항이 폐지되고, 조산사 수습기관에 대한 규정이 신설되었다. 조산사 수습기관은 “월평균 분만건수가 30건 이상 되는 병원 급 이상의 의료기관”이고, 수습생 정원은 “월평균 분만건수의 3분의 1”로 규정하였다[25].
개정된 의료법에 따라 1963년부터 일신부인병원은 조산사 수습기관으로 정부의 인정을 받았으며, 교육과정과 교육내용을 강화하여 다음과 같이 운영하였다[12]. 교육과정은 3단계로 구분하였는데, 처음 4개월 동안은 준비기간으로, 조산학 정상편, 신생아학 등의 이론강의 및 신생아실, 산과병동, 분만실, 산전관리실 등의 임상실습을 1주 간격으로 3교대로 진행하였다. 중반기 4개월 기간에는 조산학 정상편 강의와 미숙아실과 응급실 실습이 이루어졌다. 하반기 4개월 동안에는 조산학 비정상편, 소아과학, 모자보건학 및 기타 강의가 이루어졌으며, 이상분만 및 합병증을 가진 산모관리 등 심화된 실습과정에 투입되었다[12]. 교육생은 1년 교육기간 중 정상 분만개조 20건 이상을 관찰하고 모형을 이용한 실기시험을 통과한 후 정상분만 20건 이상을 직접 담당해야 수료할 수 있었다[6].
1964년 9월부터 1965년 9월까지 일신부인병원에서 조산교육을 받은 김영자 조산사의 수기에서 교육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6].
“1년 간의 조산교육은 임상과 이론을 부합시키는 실질적인 강의로 진행되었다. 즉 강의 시작 전 근무지의 특별한 환자 상태에 대하여 질문을 하시고 대답을 못하면 계속적으로 질문하였다. 그러므로 환자 상태와 관련된 의무기록 및 증상과 검사결과를 총괄하여 메모해 가야만 강의가 진행되었다. 분만 개조를 위해서는 정상분만 기전은 물론 비정상분만 기전(후방 후두위 및 둔위)도 모형 실기 연습을 철저하게 한 후 모형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분만 개조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철저하게 원리원칙을 적용하시는 교육방침은 필기시험에도 과락을 하면 통과될 때까지 계속 재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일신부인병원에서의 조산교육은 임상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이었고 매우 엄격하였다. 예를 들어, 모형을 이용한 분만개조 실습시, 제대로 연습을 하지 않은 학생에게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생명을 맡길 수 있겠냐”면서, 다음 날까지 40번 연습을 하게 하였다[6]. 특히 매혜영은 “교육생들이 좋은 시설에서 배우고 일하다 지역사회에 나가면 현장에서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언제나 현장처럼 환자를 간호하고 제일 밑바닥부터 일을 배우기를 바랐다”고 한다[6]. 교육생들은 어렵고 힘든 교육과정을 통과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일신에서 교육받은 조산사는 어디서나 신뢰를 받았다[12].

3. 1978년 『간호조산학』 발간

매혜영은 조산교육 초기부터 조산사를 위한 교과서와 저널이 없어서 최신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4]. 또한 교수자나 학생들이 한국어로 된 교재가 없어서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매혜영은 은퇴 전에 한국어로 된 교재를 발간하기 위하여 긴 기간 동안 준비하였다[8]. 처음에는 호주에서 사용한 영어 교재를 번역하려고 하였으나, 일신부인병원에서 볼 수 있는 사례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직접 교재를 집필하였다. 1978년 12월 호주로 귀국하기 바로 직전에 『간호조산학』이 출판되었으며, 매혜영은 이 책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15].
“이 교재는 이들(조산사)과 앞으로의 교육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잘 알아도 실습 없이는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임상적인 면을 중심으로 꾸몄다. 간호조산사는 여성 해부생리에 대해서 잘 기초적인 지식을 가져야 하고 정상적인 임신, 분만과 산욕기에 일단 책임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더욱 강의식으로 상세히 꾸몄다. 비정상적인 면은 보다 간단하게 하면서 문제가 있기 전의 예방과 발생 후의 조기 발견으로 의사에게 보내면서 응급처치하는 면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의사의 관리에 대해 다룬 것은 조산사가 의사 대신 처치하라는 것이 아니라 의사를 도울 때 보다 효율적으로 돕기 위함이다. 신생아의 관리도 산모의 관리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건강한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이 분만의 근본 목적이기 때문이다”
매혜영은 자신이 은퇴한 후에도 조산사 양성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26년 동안 담당했던 조산 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이 책에 남겨놓았다. 매혜영은 한국어에 능통했지만 직접 한국어로 집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있어, 조산사이던 김금련, 김영자와 의무기록사, 도서관 사서 등의 번역과 타이핑, 교정의 도움을 받았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리고 타이핑하여 약 600쪽의 교과서를 완성시켰다[6]. 이 교과서는 조산사로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여성해부생리, 임신과 분만, 비정상적인 임신과 분만, 산욕기 관리, 신생아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조산학 교재에는 없는 간호조산사(nurse-midwife)의 정의와 역할 및 가정분만과 개업조산사의 업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15]. 매 혜영의 교재는 1990년과 2001년에 두 번 개정되었으며[26], 조산학에 대한 이해와 실습을 필요로 하는 다른 교육기관에서도 교재로 활용되었다[8].

교육대상

일신부인병원 조산사 교육과정의 목표는 간호사를 훈련하여 산전관리 및 정상분만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21], 간호사 면허 소지자만을 교육대상으로 하였다. 1954년 매혜영이 다른 병원 간호부에 요청한 편지에 의하면[4],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이나 학교의 책임자나 수간호사의 추천이 있어야 지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교육생들은 별도의 수업료를 내지 않았고 숙식이 제공되었고 소정의 급여를 받았다[4]. 일신부인병원이 무료로 조산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호주장로교 선교회와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미군대한원조(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AFAK), OEC 등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4].
매혜영은 유럽과 같이 조산사를 별도로 양성하는 것 보다는 이미 훈련된 간호사에게 심화 과정으로 조산교육을 하여 간호조산사를 양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한국과 같이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간호조산사가 의료인이 부족한 농어촌 지역까지 활동한다면, 한국의 모자보건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라 확신하였다[15]. 그러나 매혜영은 조산교육을 시작하면서 간호사가 조산교육을 받기 원할지 걱정하였는데[4]. 왜냐하면 이 당시에는 간호학교를 졸업하면 조산분야의 교육이나 실무경험이 부족하더라도 조산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고, 일신부인병원의 졸업장이 정부의 인준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4]. 그러나 매혜영의 예상보다 더 많은 간호사들이 조산교육과정에 지원하고 교육받기를 희망하였다.
1953년 5월 6개월 과정으로 시작된 조산교육은 연도별로 교육기간과 교육인원의 변동이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4,9]. 1953년 1회 교육생 7명이 조산교육을 받았으며, 1954년부터 지원자가 늘어나 1년에 4회에 걸쳐 입학생 10명씩을 모집하고 교육하였다[4]. 교육생은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12개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사가 지원하였다. 1954년에는 33명이, 1955년에는 39명이 교육을 받았으며. 1955년에는 모집인원 보다 3-4배가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었다[4]. 조산사 교육과정은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교육생의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켰다. 보고서에서는 교육생들이 지원하는 이유에 대해 “이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를 찾아온다”라고 기술하고 있다[4].
1957년에는 처음으로 강원도에서 교육생 2명이 와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도의 학생 45명이 수료하였다[4].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의 목표 중 하나가 미래의 교수자를 양성하여 이들이 원래 있던 곳에서 배운 내용을 전달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8], 전국 각 간호학교의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교육생의 출신 지역을 세심하게 확인하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1957년 14개 병원의 산과 병상 수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7], 일신부인병원의 산과 병상은 40개로 가장 많았고, 동대문병원 22개, 독일적십자병원 20개 순이었으며, 나머지 병원은 10개 이하이거나 별도의 산과 병상이 없었다. 이 가운데 산과실습이나 조산교육을 실시했던 일신부인병원, 동대문병원, 독일적십자병원 중, 동대문병원은 이대 간호학과 학생들에게만 산과실습의 기회를 주었고, 독일적십자병원은 독일인 조산사의 감독하에 본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에게만 도제식으로 조산교육을 하여서, 1950년대는 일신부인병원이 유일하게 정규적인 조산교육을 담당했던 곳이었다[7].
1958년 11월에는 교육기간을 6개월에서 9개월로 연장하고, 1회 16명의 학생을 모집하였다. 교육기간의 연장으로 부족했던 수업시간이 늘어나고 더 많은 실무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제주도 출신의 학생이 와서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교육을 받으러 온 것이 되었다[4]. 이 당시 교육기간을 연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많아서 교육생으로 모두 받을 수가 없었다[8].
1962년 의료법이 개정된 이후 일신부인병원은 정부가 인정하는 조산사 수습기관이 되었다. 이에 교육기간을 정부가 정한 12개월로 연장하고 1년에 3회 학생을 모집하고 운영하였다[8]. 1963년부터 새로운 교육과정을 시작하면서 교육생 수가 일시적으로 감소하여 1964년 26명이 졸업하였다[8]. 1964년 정부가 지정한 조산사 수습기관은 전국 17곳이었고, 일신부인병원은 부산에서 유일한 조산사 수습기관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생을 모집하는 곳이었다[3].
1970년에는 총 40명의 간호사가 4월, 7월, 11월에 시작하는 3개 반에서 교육을 시작했지만, 이 중 26명의 간호사만이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졸업했다[9].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과정은 매우 까다롭고 엄격했으며 필기시험에 과락하면 교육과정에서 탈락시키는 경우도 있어서[12], 일부 교육생들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생들은 전국 모든 지역에서 모였으며, 대학부속 간호학교, 사립 간호학교, 도립 간호학교 등 20개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사가 지원하였다[9]. 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하여, “간호학교의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나서 가르치기가 어렵지만, 우리는 시골 지역에서 온 간호사들이 시골 지역으로 복귀하기를 바란다. 이런 지역에서 개업을 준비하는 졸업생을 위해 가능한 한 실용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며, 대부분의 졸업생이 100명 이상의 환자를 분만시키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9]. 일신부인병원의 궁극적인 목표가 농어촌 지역에 졸업생을 보내어 모자보건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4,6], 교육대상 선발에서 교육내용까지 세심하게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산교육 지원자 수가 매년 증가하여, 1969년에는 연간 60명, 1975년부터는 연간 80명의 교육인원을 정부로부터 허가 받았다[9]. 그러나 기숙사 부족으로 허가수를 다 받지 못하고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8]. 1970년 조산사 수습기관은 전국적으로 총 26곳이었으며, 1970년 조산교육을 이수한 사람은 총 127명이었는데[3], 이중 일신부인병원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26명으로 20.5%를 차지하였다[3]. 1978년 12월 매혜영이 은퇴할 때까지 26년 동안 총 1,037명이 조산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8].

교육생의 역할과 활동

1953년 조산교육을 시작하던 당시 일신부인병원의 직원은 의사 4명, 간호사 6명, 조산교육생 20명, 나머지 사무직, 기술직 등을 포함하여 총 52명이었다[4]. 조산교육생은 이미 간호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어서 교육생이지만 직원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는 전체 직원의 38.4%로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조산교육생은 산전관리실, 산과 병동, 분만실, 부인과 병동, 소아과 병동, 육아상담실 등을 모두 실습하면서, 간호사와 조산사의 역할을 보조하거나 실제로 수행하였다[12]. 예를 들면, 산전관리실 실습에서는 문진과 촉진을 담당하고, 산과 병동에서는 산모에게 모유수유를 지도하고, 분만실에서는 분만의 보조업무를 하였다[12]. 또한 가정분만 시에도 동행하여 분만을 보조하였다[6].
1973년 일신부인병원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까운 지역의 주민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운영을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조산사 1인을 책임자로 하고, 이를 보조하기 위해 조산교육생 2명을 매주 1회씩 파견하였다[8]. 이들은 무료진료소에서 산전관리, 산후관리, 영유아 예방접종, 가정분만 등을 실시하고, 산전관리의 필요성과 예방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무료진료소는 양산 서생면과 철마면, 부산 다대포 등에서 운영하였고, 해당 지역에 보건지소가 생기면서 등록된 환자를 모두 보건지소에 인계하였다[8]. 일신부인병원의 무료진료소는 1984년에 모두 폐쇄되었는데, 이는 1969년 보건소법 개정으로 보건지소가 읍면마다 설치되고 1980년 보건지소에 공중보건의사를 배치하도록 제도화한 것과[27]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신부인병원의 무료진료소는 11년 동안 3,633명(16,876건)이 이용하였는데[8], 여기에는 조산교육생의 역할도 중요하였다. 조산교육생은 일신부인병원 설립 초기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하였고, 무의촌 지역에서의 무료진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졸업생의 활동

졸업생의 활동 지역

조산교육의 교육목표가 전국 간호학교의 대표를 뽑아서 각 학교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대부분 본인의 학교로 되돌아갔다. 1953년 제1기 졸업생 7명 중 5명은 서울, 대구, 충주에 있는 본인의 학교로 돌아갔고, 1명은 일신부인병원의 직원으로 근무하였고, 1명은 결혼하여 일하지 않았다[4]. 1954년 졸업생 33명 중 27명이 병원에서 산과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일부는 본인이 졸업한 간호학교로 돌아가서 조산교육 실습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4]. 1955년 졸업생은 39명이었고 이들은 병원에서 일하거나 도시나 농촌지역에서 조산원을 개설하였다[4].
1957년 4월 미국 간호고문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일신부인병원 졸업생의 고용상태에 대한 조사결과가 제시되어 있다[7]. 이 보고서에 의하면, 졸업생 140명 중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104명이고, 개업 11명, 결혼 21명, 외국유학 4명이었다. 이들은 전국 대부분의 병원에서 근무하였는데, 서울의 세브란스병원, 동대문병원 등 8개 병원, 대구 4개 병원, 부산 10개 병원, 광주 4개 병원, 그 외 청주, 진주, 대전, 인천, 포항, 삼척 등 매우 다양한 지역과 병원에서 근무하였다[7]. 일신부인병원에서는 졸업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흩어져 일하면서, 산모와 아동의 건강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평가하였다[4].

졸업생 모임

졸업생 모임은 1954년 조산교육 초기부터 계획되었다. 이는 졸업한 조산사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현장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4]. 1954년 1회 졸업생 모임을 시작으로, 이후 1년에 한번 하루 종일 컨퍼런스를 개최하였다. 1955년 졸업생 모임을 2회 가졌는데, 졸업생들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부산까지 오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겼다[4]. 1955년부터 졸업생 모임이 매우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간략한 회의, 경험공유, 강의, 병동 방문 등 4가지 단계로 구성하였다. 경험공유 시 많은 졸업생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문제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과 무거운 책임감으로 늘 긴장과 좌절 속에서 일했는데,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강의에서는 조산사가 사용가능한 최신 방법을 소개하였다. 마지막 병동 방문을 통하여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질문과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4].
1957년 모임에는 졸업생 60명 참석하였고, 1959년에는 40명이 참석하였다[4]. 졸업생 모임은 특히 농어촌 지역에서 온 조산사들에게 의미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4].
“우리는 시골 지역에서 일하는 조산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그들은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들려주었고, 듣는 것만으로도 매우 즐거웠다. 첫 아이를 가진 산모의 분만이 비정상적으로 느렸다. 조산사는 모든 것이 정상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친척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한 의사를 불러 출산을 서둘렀다. 결국 아기를 잃게 되었다. 이들은 조산사에게 우리가 당신 말을 들었더라면 하고 말했다. 그 이후로 이 조산사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1962년 매혜영은 졸업생 모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16]. “매년 졸업생들은 정기적인 미팅을 가지고 있는데, 졸업생의 보고는 언제나 다양하다. 이들이 일하는 곳은 의료센터와 같은 병원부터 매우 심각하고 긴급한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고립된 지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한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조산사는 의사가 본인이 분만을 하지 못하자 자신을 불러 아기를 받게 하였다고 한다. 의사가 장비들을 소독하지 않는 바람에 조산사는 우선 본인의 집에서 장비를 가지고 와야 했다. 우리 졸업생 중 일부는 도시와 시골에서 산전간호 클리닉(pre-natal clinic)을 개설하였다. 산전간호를 받는 임산부가 증가하면서, 출산 시 발생하는 문제들도 상당 부분 줄어들게 되었다.”
졸업생 모임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졸업생들이 서로 경험담과 사례를 발표하고 최신 강의와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업무에 대한 위안과 용기를 얻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8]. 또한 매혜영은 졸업생을 관리하기 위하여 매년 전국을 다니면서 졸업생을 방문하였다[6]. 매혜영은 이들이 직면한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격려하였다[4]. 특히 조산원을 개업하는 경우 조산사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일신부인병원에서는 졸업생 모임과 방문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졸업생 관리를 이어 나갔다.
일신부인병원의 조산사 양성교육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와 의의가 있다. 첫째, 한국전쟁으로 모자보건을 담당해야 하는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문적인 의료인인 조산사를 양성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이 당시 전쟁으로 간호사의 1/3이 행방불명되었고 조산사는 파악조차 되지 않아서, 전문 보건의료인의 양성이 시급하였다[14]. 1978년 전국 조산사 수는 4,455명으로 집계되었는데[28], 1953년부터 1978년까지 일신부인병원에서 조산교육을 받은 수가 1,037명이므로 조산사의 약 1/4 정도가 일신부인병원에서 교육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신부인병원의 조산사 양성교육은 열악한 한국상황에서 의료 전문인인 조산사를 배출하는데 기여하였다.
둘째, 일신부인병원의 실습중심 교육방법은 교육 직후 조산사를 현장에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킴으로써, 모자보건 실무를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50년대 조산사 면허제도가 있었으나, 조산사의 많은 수가 제대로 된 교육과 실습을 받지 않은 채 면허를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12]. 일신부인병원은 조산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이론과 실습을 연계한 실무교육을 강화함으로써, 임상현장에 바로 투입 가능한 전문인력을 양성하였다. 배출된 조산사들은 전국의 도시 및 농어촌 지역으로 진출하여 분만 개조를 중심으로 모성과 아동의 건강관리를 담당하여, 모자보건 실무에서의 공백을 줄이는데 기여하였다.
셋째, 일신부인병원은 한국의 조산교육 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일신부인병원은 분만개조 뿐만 아니라 산전관리, 산후관리, 영유아 건강관리 등 포괄적인 모자보건을 담당할 수 있도록 조산사를 교육하고 훈련하였다[4]. 일신부인병원은 기존 조산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산사가 지역사회에서 모자보건에 대한 일차건강 제공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하였다. 이는 호주, 영국, 스웨덴, 캐나다 등에서 조산사의 업무의 범위를 여성과 아동의 건강관리뿐만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를 위한 건강상담 및 보건교육 등을 포함한 것[29-31]과 유사한 것이다. 일신부인병원이 앞서가는 국가의 조산사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한 것은 설립자인 매혜영과 매혜란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신부인병원은 한국전쟁 이후 호주장로교 선교회뿐만 아니라 UNKRA, OEC, AFAK, Oxfam 등 여러 국제기구의 후원을 받아서 운영함으로써, 조산교육을 활성화하고 지속할 수 있었다[4].
넷째, 일신부인병원의 체계적인 조산교육은 향후 조산사 면허제도를 확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62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조산사의 자격기준, 조산사 수습과정 및 수습기관에 대한 규정이 정해졌다[24]. 개정된 법에 따라, 이전의 조산교육 없이 조산사가 될 수 있었던 방법이 모두 없어졌으며, 일신부인병원에서 간호사를 조산사로 양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조산사 면허제도가 설립되었다. 이는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의 목적과 방향이 WHO와 UNKRA [5] 및 미군정의 권고안[7] 등과 일치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군정의 보고서에서는 일신부인병원이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국에서 조산교육을 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소개하였으며,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과 같은 교육훈련을 통해 간호-조산사 제도(nurse-midwifery)를 확립할 것을 한국정부에 권고하였다[7].
다섯째, 조산사 양성교육을 통해 일신부인병원의 체계적인 모자보건 시스템을 전국적으로 전파하였다. 일신부인병원은 설립 초기부터 산과 병동, 소아과 병동, 산전관리실을 운영하였고, 예방적 차원에서 산전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4]. 대부분의 산모가 분만에 임박하거나 분만시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만 병원에 와서, 산모나 아기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산전관리를 적극적으로 받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모자동실을 운영하여 산모에게 모유수유 및 신생아 관리법을 교육하였고, 별도로 영아부를 운영하여 미숙아와 신생아의 간호를 담당하였다[16]. 이러한 임산부와 영유아를 위한 체계적인 관리는 조산교육을 통해 다른 지역의 간호학교와 병원으로 확산되었다.
마지막으로,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은 부산지역을 넘어서 전국 도시와 농어촌 지역에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전 지역의 모자보건 서비스의 질 향상에 기여하였다. 조산교육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였으며, 교육을 마친 후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일신부인병원에서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각자의 근무지에서 활용함으로써, 한국 전체의 모자보건 서비스 질 향상을 가지고 왔다.
전쟁 직후 한국의 열악한 환경 가운데 일신부인병원이 조산사를 양성하여 배출함으로 모자보건 상황을 개선하는데 기여한 역할과 가치는 기록된 문서에서 보이는 이상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일신부인병원의 조산사 양성교육은 전문 보건의료인이 절실한 상황에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실무 중심의 교육을 통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배출하여 지역사회뿐 아니라 전국의 모자보건 환경 개선에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체계적인 산전 및 산후관리 시스템을 통해 한국의 모자보건 서비스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본 연구는 1차 자료를 확보하는데 제한이 있었고 소실된 통계들이 있었으나, 그동안 흩어져 있던 자료를 검토하고 통합하여, 일신부인병원이 조산사 양성교육을 통해 전후 한국 지역사회 모자보건 서비스에 공헌한 바를 보다 체계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Conflict of interest

The authors declared no conflict of interest.

Funding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Korean Academy of Community Health Nursing History Research Fund.

Authors’ contributions

Eunyoung Kim contributed to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funding acquisition, project administration, visualization, writing-original draft, investigation, resources, and supervision. Jihyun Lee contributed to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methodology, visualization, writing-original draft, review & editing, investigation, and validation.

Data availability

Please contact the corresponding author for data availability.

Acknowledgements

We would like to thank Ilshin Christian Hospital, The Institute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Korea, and Kyonggi University Soseong Museum for their assistance in collecting primary data.

Figure 1.
The Pictures of Mackenzie CM.
rcphn-2025-01109f1.jpg
Table 1.
Training Period and Number of Trainees
Year Training period (month) Number of recruits Number of graduates Cumulative number of graduates
1953 6 - 7 7
1954 6 40 33 40
1959 9 48 42 264
1964 12 50 26 441
1968 12 50 37 566
1970 12 60 26 622
1972 12 60 34 690
1978 12 80 64 1,037

This table is adapted from the Ilshin Women’s Hospital annual report [4,9] and Ilshin Christian Hospital's 40-year history [5];

The number of people to be recruited is not recorded, but it is estimated to be around 50.

Figure & Data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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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gure 1. The Pictures of Mackenzie CM.
      The Midwifery Training Program at Ilshin Women’s Hospital and Its Meaning: From 1953 to 1978
      Year Training period (month) Number of recruits Number of graduates Cumulative number of graduates
      1953 6 - 7 7
      1954 6 40 33 40
      1959 9 48 42 264
      1964 12 50 26 441
      1968 12 50 37 566
      1970 12 60 26 622
      1972 12 60 34 690
      1978 12 80 64 1,037
      Table 1. Training Period and Number of Trainees†

      This table is adapted from the Ilshin Women’s Hospital annual report [4,9] and Ilshin Christian Hospital's 40-year history [5];

      The number of people to be recruited is not recorded, but it is estimated to be around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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